칼럼

알렉스 룽구의 인사이트를 나눕니다.

나의 고백록 - 영적 회의주의에 빠지고 다시 벗어나온 이야기

하이어셀프(Highe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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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평생 싸워왔던 저의 대응기제를 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새로 되찾은 것 같아서 제 깨달음을 여러분하고 나눠보고 싶습니다. 깊은 자기성찰의 예시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분노가 많은 나


저는 어릴 때부터 제 삶은 반항심, 분노, 원망과 저항감의 태도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 공부, 남의 말, 사회적 지시, 일, 커리어 등에 지속적인 불만과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아무것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선 "무조건 반대하기"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청개구리 같은 성향이 원래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으로 학습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 1살 아들도 이미 비슷한 행동을 보여서^^ 본성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아마 타고난 본성과 에고가 서로 자극하며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간다는 게 답이겠죠 :)

아마 이러한 성향 때문에 저는 늘 독립적인 태도를 가졌고 (예: 18살 때 고졸하자마자 바로 부모님께 반거짓말을 하고 혼자 한국에 왔어요!), 비판적 사고, 혼자 해야 한다는 책임감, 의식성장과 "사회적인 걸 다 초월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느 정도의 반항심과 자유로운 생각 없이는 제가 하는 일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ㅋㅋ

하지만 당연히, 메달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독립적인 만큼 늘 학교/기업/기관을 향한 불편한 마음, 갇혀 있는 느낌, 사회에 관한 불만과 조용한 원망, 반항심, 사회적 폐쇄공포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반항심이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1. 피해의식: 

어떤 일이 조금 어렵거나 도전적이면 재빨리 그 한계를 만들어낸 희생양을 (제 머릿속에) 찾아내곤 했습니다. 부모의 양육을 비롯해, 저를 망친 학교 선생님들, 젊은 사람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교육과 경제 시스템, 사람을 노예화 시키는 기업문화, 무식한 사회와 '대중’들까지 한 번이라도 탓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추상적일수록 밉기 쉬웠어요 - 사회, 기업, 시스템, 문화, '그런 사람들' 등등ㅎㅎ

이러한 태도는 저를 항상 조용한 분노 상태에 빠뜨리곤 했어요. 이 독선은 저에게 가짜 우월감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큰 아픔을 주기도 했어요 - 짜증, 내적 열기, 막히는 목소리 그리고 갑상선 문제로 이어졌죠.

부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분노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 우리 분노 벌을 받는다!"


2. 게으름:

피해자의 반항심이 늘 '행동 거부’로 이어졌습니다. 학교 공부라든가, 회사 일이라든가 "나는 이걸 왜 해야 하지? 수용하면 바보지!" 같은 태도로 시킨 일을 아예 하지 않았거나, 대충 하거나, 마지막 순간 벼락치기를 해왔습니다. 심지어, 이 습관이 너무 깊이 뿌리 박혀서 제 사업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금만 억지스럽거나 통합성이 떨어지는 일을 해야 됐을 때 절대 하지 않거나, 충분히 미루곤 했습니다.

그 결과 - 저는 잠재력을 포기하고 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창조하고 나누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내가 옳다"는 생각과 반항심이 더 중요해서 나태함이 늘 스며들었어요. 아무래도, 노력이 다는 아니지만, 훈육 없이는 원하는 만큼 결과를 내지 못하죠.

지난 몇년 동안 하이어셀프의 철학에서 "두려움을 넘는 실천"을 이렇게 강조한 이유가 바로 저의 대응기제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보입니다. 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그대로 여러분과 나눈 것입니다. 제 두려움과 그것을 가리는 분노를 솔직하게 돌아보니까 제 패턴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긴 했는데, 아직도 역치를 넘으면 분노와 반항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나태함이) 튀어나오기는 해요.


3. 오만과 경멸:

아마 가장 안 좋은 성격은 제 오만함과 사회적인 것에 대한 경멸이었습니다. 저는 제 피해의식을 물론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에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가리기 위해서 저를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초월한 은둔고수’로 포지셔닝을 했습니다 - 무엇보다도 제 자신에 대한 이미지, 하지만 똑같이 의식성장 조력자로서의 대중적 이미지도요.

그 태도로는 사회의 모든 것이 더욱더 역겹게 느끼게 됐습니다. 소비문화, 돈, 주식, 쾌락, 반성 없는 삶, 흑백사고, 지위, 성공 - 즉 거의 일상의 모든 것이 다 천박하고 의식이 낮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몰래 성공을 원했어도, 성공을 동시에 낮춰 봤어요. 심지어 의심없이 사회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조차 낮춰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별로 역시 저는 (가상으로) 늘 우위에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식성장을 하고 문명의 상대성을 깨달을수록 그 깨달음을 제 대응기제에 그대로 집어넣었습니다. (의식성장이 부분적이라면 그런 함정이 생깁니다!) 돈, 지위, 성공, 이론, 사회 등이 상대적이고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저는 그것의 쓸모를 보지 않고, 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듯, 사회의 모든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의주의로의 전락


점차 어떤 분야에도 불구하고 "뭐, 어차피 다 인공적인, 상대적인 개념이고 사람을 억압할 뿐이다" 같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점 가서 어떤 책을 훑어봤어도 그 내용의 무의함에 대한 경멸만 느꼈습니다. 새로운 어떤 철학, 이론, 심리 기술, 종교적 관점, 과학도 저는 그 한계와 결함만 보고 아주 빨리 그것을 무가치한 걸로 치부했어요.

이 판단이 결국 제 창조성으로까지 퍼졌습니다. 글을 쓰거나 무언가를 창조하려 앉을 때 다 가짜 같고 모두 제 통합성과 어긋나는 빈말 같았어요. "내가 나누는 어떤 것도 다 상대적인데 사람들을 속일 수 없잖아ㅡ"라는 생각으로 창조도 거의 멈췄습니다.

다른 말로, 완전한 회의주의에 빠져버린 거죠.

갑자기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영혼의 어두운 밤'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의식성장, 명상, 수행을 하다 어느 때 실존적 회의주의, 허무주의, 무의함에 빠지는 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저는 오랫동안 삶을 긍정하는 철학에 붙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도 그 깊은 심야를 피할 수 없었던 거죠.

모든 이론, 철학, 교육, 사회, 문화와 의미의 상대성을 깨닫고 새로 발견한 그 '텅 빈 곳'에서 중심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작년 가을즈음이었습니다.





빛이 보인다


저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관조해 봤습니다. "내가 분명히 놓친 게 하나 있을 텐데?! 지금 안 보이는 진실이 있겠지? 도대체 어떤 관점의 오류에 빠졌을까? 이 회의주의로 얻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같은 생각으로 끊임없이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단계단계 큰 3 가지 깨달음을 통해 다시 수렁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을 10 페이지만 읽고 덮어버렸지만) 제 관조를 위해 힌트를 주고 빛을 보여준 도서가 다음 3 가지입니다. 제 깨달음의 과정을 책을 읽은 순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1. Parker J. Palmer - The Courage to Teach (한국어: 가르칠 수 있는 용기)

2. Leo Tolstoi - Confessions (한국어: 고백록)

3. Paul Tillich - The Courage to Be (한국어: 존재의 용기)


1. Parker J. Palmer - The Courage to Teach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파커 J. 파머는 평생 냉소적이었던 한 교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교수는 늘 비평적이었고 종종 다른 관점을 반박하며 자신이 옳음을 주장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성찰의 순간에 그 교수가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사회의 비평가이자 심판자로서 한발 물러서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느꼈지만 마주할 수 없었던 모든 거짓됨을 '사회'에 투영하고 있었고, 그 투영을 통해 나 자신의 분열감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파머는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사회의 '상대성'을 폭로 도구로 사용하여 옆에서 그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자신이 그 모든 것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OMG! 이 글을 읽고 저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저지르고 있던 죄였어요!

저 역시 사회라는 개념 전체를, 그리고 사회의 모든 산물들을 상대적인 어리석음으로 낙인 찍음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자 했던 겁니다. 제 논리에서, 이러한 행위로 저는 바로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 경멸의 역할은 역시 제가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수의 고백은 저로 하여금 저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느낀 분열감은 바로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우월한 존재다' vs. '나는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존재다'였습니다. 나의 부적절함을 가리려고 사회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제 피해의식은 커녕 나태함과 벼락치기, 그리고 특히 저의 오만함도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빠진 회의주의까지도 그 오만함을 극단적으로 연장할 시도일 뿐이었습니다. 사회의 모든 개념을 다 상대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제가 그저 특별해지려고 한 것입니다!

제가 그 순간 깨달은 건, 이 전체 기만을 저 혼자서 짜놓은 것입니다! 사회, 부모, 선생님, 기업, 정치 등이 제 자유를 억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만 혼자서 그런 것처럼(!) world-building 했을 뿐이에요

왜요? 제 머릿속에서라도 우위에 서기 위해서.

그 목적을 이루려고 저는 피해의식 (당하고 있다는 스토리), 나태함과 도피, 분노, 원망, 오만, 경멸, 그리고 회의주의의 코스프레까지 다 해놓고 저만의 고통을 직접 생산해놓은 것입니다.


2. Leo Tolstoi - Confessions (고백록

유명한 <고백록>에서는 톨스토이가 자신의 영적 위기를 고백하며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깊이 탐구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운 것은 그는 그야말로 저와 똑같은 상황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론이 상대적이고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 긴 탐구 끝에 톨스토이가 다음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으로 삶의 구조를 해부하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이성의 한계를 깨닫지 않는다면 결국 그 무의미함 속에서 무너집니다.

이성 자체가 정의상 상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답을 내줄 수 없죠! 인간의 이성으로 삶의 절대적 의미를 파악한다는 건 굉장히 오만한 생각입니다! 이성은 신/우주/진리 안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삶의 (커다란) 의미를 찾는 건 절대적인 신앙뿐이라는 결론에 달합니다.

톨스토이가 그 신앙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찾았지만, 그 형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스도, 불교, 무속, 절대 진리 등에 어떤 형태더라도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 우리가 인간의 뇌로 현실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을 어떻게 불러도 우리 한정된 이성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깊이 새겨놓아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말이 우선 제 오만함을 일깨워 줬습니다. 일시적으로 다 안다고, 다 이해했다고 생각한 제가 훨씬 더 큰 의미 안에 속한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였습니다. 분명히 나보다 더 위대한 현실이 있는데, 그 신뢰를 잃으면 안 됐습니다.



3. Paul Tillich - The Courage to Be (존재의 용기)

제 자기기만을 드러내고,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직도 그 상대성 안에서 단단하게 삶을 살아갈 철학이 불투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답을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에서 찾았습니다.

<존재의 용기>에서는 틸리히가 현대인이 직면한 실존적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며, 존재 자체에 대한 용기를 강조합니다.

틸리히는 먼저 불안과 두려움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실존적 불안은 무(無)/비존재의 위협에서 비롯되는 반면, 두려움은 형태가 있는 대상을 향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불안은 존재의 무(無)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한 기본 상태라고 합니다. 바로 그 (해결되지 않는)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우리가 가상으로 형태가 있는 온갖 두려움을 꾸준히 만들어내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관한 컨트롤을 느끼려고 합니다!

틸리히 이어서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우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공장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공장이기도 합니다. 첫째, 신을 피하기 위해, 둘째, 불안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벌거벗은 절대성(=신)은 벌거벗은 불안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유한한 자신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존적] 불안을 [형태 있는] 두려움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헛된 시도입니다. 기본적인 불안, 즉 유한한 존재가 무(無)의 위협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용기


틸리히의 말을 읽고 저는 갑자기… 엄청난 분노가 솟아올라와 제 안의 회의주의를 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인 곤경입니다! 이 곤경으로부터 주의를 다른 데로 옮기려고 우리는 인간의 온갖 드라마를 스스로 펼쳐냅니다.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두려움, 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시기심, 분노, 절망, 회의주의, 욕심, 외로움, 미움 등이 전부 다 만들어내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댑니다. 물론 다 결과가 없어서 늘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것이야말로 화나야 하는 대상입니다!

저는 진짜로 제 원망과 분노를 계속 붙잡고 싶다면 그것을 나 자신, 다른 사람, 사회 등에 돌리지 않고 차라리 이 삐딱한 존재에 향해야 한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진짜로 저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다면 이 곤경 속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이 저주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의미, 사랑 그리고 기쁨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답이었죠! 저는 이제 제 분노를 무(無), 실존적 불안, 정신적 기만, 자기고립 그리고 선하지 않은 모든 것에 맞서는 힘으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고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

이것이 바로 존재를 향한 용기입니다. 인간의 저주에 빠지지 않고,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을 온전히 산다는 것.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이 정확히 니체가 말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용기'와 동일합니다.

삶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 방 안에 틀어박히고 허무주의와 절망에 빠지는 건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저 바보 같은 세계관을 떠올리고 자신만의 독선과 원망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공허하고 우울할수록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더욱 쉬워요.) 이건 역시 겁쟁이의 도피처입니다. 저도 그 함정에 빠졌어요.

우리의 의무는 그런 에고적인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삶이 의미가 있다는 걸, 삶이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걸 증명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에 그러지 않더라도 내가 그걸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가장 진정한 가치와 목적을 설계해놓고 매일매순간 하향 끌림에 저항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입니다.

아마 이 글의 끝에서 제가 제 분노를 초월하고 완전히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했다고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 대신, 저는 그 분노를 '격상'시켰습니다. 사람, 사회, 이론에 대한 자기 과시적 분노를 존재론적 원칙으로 - 바로 삶을 위한 '용기'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앞으로 제 가치관에 따라 살려면 당연히 개념이 필요합니다. 사회와 개념이 문제가 아녔다는 게 이제 명백히 보입니다. 물론 모든 개념은 상대적이지만,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실제 삶도 달라집니다. 자기기만을 하여 이기적인 의도에 사용한다면 더 깊은 두려움과 분노에 빠지고, 우리의 진정한 가치관에 사용한다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치유하며, 관계를 형성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야 아무도, 아무것도 저를 가둔 적이 없다는 것이 보입니다. 제가 영웅이 되고 싶어서 그런 척하며 제 머릿속에서 스스로를 가두었던 것뿐이었습니다. 회의주의는 그 스토리의 절정에 불과했습니다.

외부를 탓하거나 거부하기는 너무 쉽지만,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쇠사슬을 스스로에게 묶어버리는지 각자가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였지만, 여러분도 이 여정에 공감하며 자기 수행에 영감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분노가 많다면, 그 분노를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삶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rewell.

A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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